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요토미 히데요리 (문단 편집) ==== 오사카 겨울의 진 ==== [[1614년]], 호코지(方廣寺) 종명(鐘銘) 사건을 계기로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결별하면서 오사카 겨울 전투가 발발하였다. 이때 히데요리는 [[후쿠시마 마사노리]], [[가토 요시아키라]] 등 도요토미 가문의 휘하에서 싸우며 은혜를 입은 전적이 있는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격문을 날렸으나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는 현역 다이묘는 거의 없었다. 반면 [[세키가하라 전투]] 당시 [[가이에키]]을 당하여 다이묘의 지위를 상실한 다이묘들이나 그들의 가신들이나 친족이었던 [[사나다 노부시게]], [[쵸소카베 모리치카]], [[모리 카츠나가]], [[아카시 타케노리]] 등과 그 외에도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[[고토 모토츠구]], [[반 나오유키]] 등의 [[로닌|낭인]]들이 도요토미의 격문에 반응하여 곧장 [[오사카 성]]에 입성하였다. 그러나 이들 낭인들은 사기가 매우 높았던 데 반해 [[오합지졸]]로 통제가 어려웠고, 낭인 무리와 오노 하루나가(大野治長, 1569 ~ 1615) 및 [[요도도노]] 측이 전투의 마지막까지 서로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. 전술에 있어서도 사나다 노부시게 등은 [[교토]]로 진격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하루나가 등의 반대로 결국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. 전쟁 초반, 기쓰가와구치[* 일본 교토부와 미에현을 가로지르는 강이며 요도가와 강의 지류] 전투(木津川口の戦い), 바쿠로부치[* 현재의 오사카시 니시나가 보리역 의 북측] 전투(博労淵の戦い) 등에서 도쿠가와군에게 연패한 도요토미군은 노다・후쿠시마[* 오사카시 후쿠시마구의 서부와 고노하나구의 일부] 수상전투(野田・福島の戦い) 및 이마후쿠[* 야마토강 북쪽] 전투(今福の戦い), 시기노[* 현재의 시가노촌] 전투(鴫野の戦い) 등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남은 주변 성채를 모두 버리고 오사카 본성으로 철수하였다. 그러나 오사카 성에서의 전투에서는 도쿠가와군이 도요토미 측 낭인들의 활약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격퇴당하면서 성내 진입이 좌절되었고, 특히 사나다마루 전투에는 도쿠가와 측이 큰 손해를 입었다. 이에 도쿠가와군은 전술을 바꾸어 심리적인 압박감을 줄 의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사카 성에 포격을 가하였다. 이윽고 도요토미 측과 도쿠가와 측 양쪽이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면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에 화친을 제의하였다. 당초 히데요리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요도도노 등의 설득으로 결국 오사카 성의 [[해자]]를 메운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받아들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